[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낡은 골목, 전통 깊은 맛집. 백제정육점, 경상도집, 보건옥

2019/06/25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마치 목이 마르기 전에 물을 마셔야 한다는 말이 있듯 고기 생각이 나기 전에 이미 고기를 먹었어야 한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혹한 혹서 기후 덕에 미국 해병대가 최적의 훈련 장소라고 밝힌 한반도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여름을 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극기다.

고기라고 하면 꼭 하얀 마블링이 박힌 한우 투뿔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강남 어딘가에서 남이 구워주고 남이 사주는 고기를 먹는 이들이다. 세련된 건물과 흡족한 서비스, 고급스러운 재료를 보면 역시 돈값을 한다 싶다. 그러나 자주 먹을 수 있는 값은 아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어깨를 툭툭 쳐가며 가볍게, 흥겹게 먹을 수 있는 분위기 역시 아니다.

친구의 집에 온 것처럼, 그의 부모처럼, 익은 김치를 내어주고 반갑게 인사하며, 너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보다 오래된 곳에 앉아 고기를 먹는 그 정취는 또 이길 수 없다. 친구가 보고 싶을 때, 그런데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몇 주 전일 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을지로로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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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동빙고가 되어주는
‘백제정육점’

시작은 종로5가의 ‘백제정육점’이다. 불판 앞에 앉는 것조차 짜증 나는 날, 백제정육점은 모두의 환영을 받는다. 북새통 같은 광장시장 육회 골목을 어슬렁거리지 말자. ‘정육점’이라는 든든한 이름을 단 이곳에 가면 입맛을 시원하게 돋우는 유일한 육회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육회만 파는 집은 아니다. 육회를 시작으로 등심, 특수부위, 차돌박이 등 소의 전 부위를 먹을 수 있다. 하물며 설렁탕, 육개장 같은 식사 메뉴도 ‘일절’이다.

이 모두가 평균 이상이지만, 동계올림픽이 열리면 전 경기를 다 챙겨보더라도 쇼트트랙은 꼭 사수하듯이 이 집의 육회는 충분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육회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면 이 말이 괜한 헛소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산처럼 수북이 쌓인 육회 위에 올라간 달걀노른자를 모임의 주선자가 술술 살살 고기에 섞어주면 맛의 밀도가 한결 짙어진다. 이에 서걱서걱 씹히는 깨소금과 설탕의 조합은 육회 맛의 비결이자 포인트다. 혹자는 ‘너무 달다’고 불평하기도 하는데 입맛을 돋우는 용도로 생각하면 절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사각사각 얼음과자 같은 소고기의 낮은 온도에는 오히려 입자가 씹히는 설탕의 단맛이 조화가 나쁘지 않다. 온도가 낮을수록 미각이 둔해지기에 어느 정도 강한 단맛은 맛의 설계에 필요하다.


더불어 짧게 치고 끝나는 설탕에 배의 진득한 단맛이 섞이고 파의 알싸한 맛까지 엮이면 오색단청처럼 맛이 화려해진다. ‘육회’라는 두 글자 아래 담긴 맛의 스펙트럼이 만만치 않다. 산더미 같은 한 접시에 차가운 맥주를 곁들여 먹노라면 여름을 피하는 동빙고라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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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에서 즐기는 연탄불의 맛,
‘경상도집’

비싼 돈을 내지 않더라도 남이 구워주는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종로5가에서 멀리 가지 않은 국립의료원 뒷골목에 가면 간판도 없는 작은 고깃집이 있다. 이름은 경상도집, 카드 결제도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좌석 없이 노상에 깔린 탁자에 요령껏 앉으면 된다.

두 명이 오더라도 주문은 3인분으로 시작하는 것이 관례. 이유는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탓에 추가 주문은 시간이 걸린다. 일 인분은 아예 주문 받지도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욕쟁이 할머니가 떠오르지만, 욕먹으며 밥 먹을 일은 없다. 무심해 보여도 빈 국그릇을 그냥 보지 못하는 살뜰한 서비스를 겪게 된다.

이곳에서 파는 메뉴는 돼지갈비 하나뿐. 단맛과 짠맛이 2:3 정도의 비율로 느껴지는 거뭇거뭇한 돼지갈비는 서울 어디에 내놔도 쳐지지 않는다. 없다시피 한 인테리어를 감안한 어드밴티지 없이도 충분히 먹어주는 맛이다.

그 맛의 연유를 살핀다면 며느리도 모르는 양념, 좋은 원물 등이 손에 꼽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연탄불 화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방을 데우던 그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 고기를 구우면 인간이 좋아하는 ‘구운 맛’이 극대화된다. 155도 이상 열을 받으면 나타나는 마이야르(maillard) 현상에, 설탕과 간장이 열을 받아 캐러멜화되는 과정까지 거치면 몸에 좋은지 나쁜지 따질 겨를 없이 빠져들게 되는 맛이 탄생한다. 고기 한점, 한점 살펴가며 가위로 탄 부위를 잘라내는 정성까지 곁들여지고 사람들은 이름도 없는 이곳에 장사진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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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서울식 옛날 불고기
‘보건옥’

누가 뭐래도 고기는 불판 위에 구워야 제맛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나는 을지로4가 ‘보건옥’에 간다. 불고기로 한가락 하는 이 집은 이웃 우래옥에 비해서도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원물 고기의 등급 자체는 차이가 나지만 파김치, 멸치볶음 등 한 상 쫙 깔리는 밑반찬을 앞에 두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저절로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위로 볼록한 구형 불판도 좋고 아래로 오목한 신형 불판도 좋다. 일단 불판을 가스 불 위에 달구며 국물 자작한 불고기를 휘적인다. 애교 섞인 말투처럼 은근한 단맛이 간장의 짭조름한 맛 뒤로 몸을 숨긴다. 버섯과 야채도 숨을 죽인다. 익은 불고기는 넉넉히 앞접시에 덜어 담는다. 고기가 줄어들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마 ‘난 이제 됐어’라고 손사래치는 이도 생기리라. 그래도 조금 더 먹으라고 덜어주는 마음, 빈 잔이 보이면 말없이 따라주는 친구의 옆모습이 낯익다.

불고기로 아쉽다면 김치찌개로 넘어가는 게 순서다. 고깃집 김치찌개라 들어간 고기양이 남다르다. 아닌 게 아니라 점심이면 김치찌개 먹는 사람이 태반이다. 김치 반 고기 반인 찌개를 약한 불에 뭉근히 익힌다. 고기와 김치의 결이 풀리고 말랑말랑 살캉살캉 해 질 무렵, 흰밥을 시킨다.

하얀 쌀밥 위에 건더기를 한 국자 퍼 올린다. 숟가락으로 퍼서 입안 가득 넣는다. 시고 기름진 국물이 입안에 그득하다. 부른 배로 이야기를 나눈다. 넘치는 정을 나눈다. 무덥고 힘들지만 견딜만한 한국의 여름이다. 오래된 식당이 있고 오래된 벗이 있어 괜찮은 하루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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