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기와집 2,000채의 재산으로 문화재를 지킨 거인,간송 전형필 특별전

2019/02/27

수백 미터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름난 맛집일까요? 아닙니다. 뜻밖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어느 미술관이었어요. 도대체 왜? 무얼 보려고 그 길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저리도 묵묵히 감내하는 걸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더구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진풍경이 해마다 어김없이 봄, 가을 한 차례씩 펼쳐진다고 했지요.

2011년 가을이었어요. 미술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그런 미술관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답니다. 나지막한 산자락 중턱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미술관 건물이 주는 첫인상은 그다지 강렬하지도 않았고요. 세월의 때가 켜켜이 내려앉은, 그것 자체가 문화재처럼 보이는 오래된 전시장은 심지어 편안한 관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미술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린 까닭은?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보물 중 하나인 신윤복의 <미인도>

그럼에도 사람들이 미술관 앞에 줄을 서는 까닭은 이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희대의 보물들 때문이었습니다. 워낙에 이름난 문화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지만, 간송미술관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요. 2008년에 방송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인도>를 실제로 볼 수 있대! 직접 가서 봐야겠군!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어느 틈엔가 저 또한 긴 줄 한 가운데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답니다. 간송의 보물을 보기 위해서 말이에요. 간송미술관 전시회를 여러 번 취재해서 방송도 했고, 미술관이 펴내는 도록 《간송문화》도 꾸준히 구해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사실들을 배우고 알아가면서 미술관의 설립자인 간송은 대체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간송이 1938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 보화각(葆華閣)은 이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 간송 전형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 있더군요. 전기 작가 이충렬 선생이 쓴 《간송 전형필》입니다. 간송은 한 마디로 시대의 거인이었습니다. 문화로 나라를 지킨 거인. 일제강점기에 대한독립을 부르짖으며 싸운 것만 독립운동이요 애국이 아니었음을 간송의 삶은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뜻있는 일에 쓰고자 했던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에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것도 20대에 말이에요. 이때부터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모아들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지켜낸 문화재를 보기 위해 후손들은 기꺼이 몇백 미터씩 긴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거고요. 감동은 이렇게 또 다른 감동으로 이어집니다.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화첩

(좌)해악전신첩_ 겸재가 72세 때인 1727년에 그린 화첩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
(우)금강내산_ 정선, 《해악전신첩》 중 <금강내산>, 비단에 채색, 32.5×49.5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에 수장된 조선 시대 회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겸재 정선의 작품입니다. 겸재가 72살 때 만든 《해악전신첩》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이지요. 금강산을 비롯해 강원도와 동해안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 21점이 수록된 이 화첩이 구출되는 과정은 간송이 지켜낸 그 어떤 보물보다도 더 극적이었습니다.

사랑채 한쪽에 붙은 변소엘 가다 보니까 머슴이 군불을 때고 있는데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처넣고 있단 말예요. 그런데 문득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중하게 꾸민 책이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 책을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펼쳐보니 겸재 정선의 화첩이란 말예요. 내가 그 시각에 변소엘 가지 않았거나 한 발짝만 늦었어도 그 화첩은 아궁이 속에서 불타서 영원히 사라졌을 테지요.

그걸 들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펴 보이며 조금 전의 위기일발을 말하자 그저 그랬느냐는 반응일 뿐이었어요. 그래 내가 말했지요.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거니 내게 파시오.’라고. 그러자 주인은 순순히 그러자는 거예요. 내가 ‘값을 얼마나 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생각해서 내라는 거예요. 그래 몇 마디 시세 얘기를 하다가 그때 돈으로 20원을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다음날 용인에서 ≪겸재화첩≫을 갖고 서울에 올라와 이순황 씨를 만나 적당한 곳에 팔아달라고 부탁했었지요. 그 바람에 간송댁을 방문하게 되었고, 또 그분을 처음으로 뵙게 됐던 거지요. 듣던 대로 아주 부드럽고 따뜻하더군요. 늘 미소를 짓는 인상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아래인 청년이었는데 아주 품위가 있어 첫눈에 반했어요.

– 장형수 <간송 수장의 비화> ≪보성 75호≫ 1975년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었던 친일파의 거두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의 화첩은 이렇듯 극적으로 당시 골동품 거간이었던 장형수 씨에 의해 구출돼 간송의 품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이 무슨 인연이고 운명이었을까요. 아궁이 땔감으로 그대로 불태워졌다면 70대의 노장이 그린 만년의 걸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고려 13세기, 높이 41.7cm, 국보 제68호

고려청자가 이룬 최고의 예술적 성취가 집약된 명품 중의 명품 <청자상감운학문매병>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청자는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강력하게 각인된 것이었으니, 훗날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역시나 하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저 아름답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 귀중한 물건에도 잊지 못할 사연이 숨어 있답니다.

 

이 물건은 발굴되기가 무섭게 골동 거간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 거간은 자기 단골손님이었던 일본인 거물급 수장가에게 팔기 위하여 대구로 가지고 갔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지 공교롭게도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 일본으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허탕 치고 말았다. 만약 그 일본인 수장가가 있었다면 이 물건은 영원히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고 말았으리라.

이 거간은 생각 끝에 하는 수 없이 꿩 대신에 닭 격으로 골라잡은 상대가 대구에서 치과의원을 개설하고 있던 신창재 씨였으며 가까스로 사천 원에 넘기고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신창재 씨는 그 얼마 후 박재표 씨 손을 거쳐 서울 필동에 살던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 씨 손에 넘겼는데 그 가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 씨가 두둑이 얹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총독부박물관에서도 이 물건이 탐나서 일만 원까지 내겠다고 교섭이 왔으나 엄청난 가격 차 때문에 결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장가들을 비꼬아가며 비웃던 일본인 골동계 인사들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일이 장안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총독부박물관도 값이 엄청나게 비싸 손을 대지 못하고 군침만 꿀떡꿀떡 삼키고 있던 고려청자 희대의 명품 천학매병을 그들이 식민지 백성이라고 깔보던 삼십도 채 안 된 새파란 청년이, 마치 청과시장에서 사과 몇 알 사듯이 가격도 한 푼 깎지 않고 냉큼 사버리고 만 것이다.

– 이영섭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삼십년> ≪월간 문화재≫ 16호(1973년 11월)

 

반드시 지켜야 할 물건이라는 판단이 서면 통 크게 쓸 줄 알았던 간송의 배포와 결단력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니 상대인 일본인도 그만 두 손 다 들 수밖에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큰 손을 상대로 거둔 쾌거에 식민치하에서 억눌리고 숨죽여 살던 이들의 속이 잠시나마 얼마나 후련했을까요. 문화재를 지키는 것은 이렇듯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인 수집가로부터 고려청자를 사들인 집념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중기, 높이 9.9cm, 국보 제270호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살포시 품에 안았습니다. 새끼는 한쪽 손을 들어 어미의 볼을 더듬고 있고요. 모자의 애틋한 정이 담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작품이지요. 연적 하나에도 이렇게까지 따뜻한 정감을 담아낼 줄 알았던 고려 도공의 마음자리는 얼마나 고왔을까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집니다.

훗날 국보로 지정된 이 귀한 물건의 주인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존 개스비(Sir John Gadsby)라는 영국인 변호사였습니다. 남다른 안목으로 모아들인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수집품은 당대에도 명성이 자자해서 ‘꿈의 컬렉션’으로 불렸다지요. 간송은 이 물건들을 꾸준히 눈여겨봅니다. 개스비가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 전에 수집품을 정리할 것으로 보고 때를 기다린 겁니다.

국보 제74호로 지정된 <청자오리형연적> 역시 간송이 사들인 개스비의 수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옵니다. 간송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존 개스비와 세기의 담판을 벌이지요. 개스비가 20년 동안 모은 고려청자 22점을 놓고 치열한 밀고 당기기를 했지만, 사흘간의 치열한 협상에도 소득이 없었답니다.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결국 청자의 주인이 될 운명이었을까요. 이번엔 개스비가 경성으로 날아와 간송을 만납니다.

간송은 개스비를 성북동의 보화각 공사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사재를 들여 박물관을 짓는 간송의 뜻을 헤아린 개스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이 내놓은 청자 22점 가운데 20점을 간송에게 넘겨줍니다. 자그마치 기와집 400채 값에 말이에요. 끈질긴 인내심과 태산 같은 배포가 아니었다면 개스비의 수집품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많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해준 것을 치사하고, “나도 귀하의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집품을 즉석에서 인수하였다.

(중략)

작별할 때, 나는 “오랫동안 애장하였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 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하였더니, 그는 “암, 가고말고요. 꼭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기를 한국의 수집가인 귀하가 한국으로 도로 가져가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하는 그의 대답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

– 전형필 <고미술품수집비화> 《신태양》 1957년 9월호

 

 

▍간송 전형필의 문화 보국 정신을 되새기다

그렇게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모은 우리 문화재가 수천 점에 이른다고 하지요. 이 가운데 국보가 12점, 보물이 31점이나 된다고 하니 개인이 이런 엄청난 역사적 소명을 감당했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구절절 사연이 깃든 간송의 보물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참 고마웠습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아낌없이 쏟아부은 선구적 정신의 소유자가 있었음을. 간송이야말로 문화로 나라를 지킨 독립운동가였음을. 100년 뒤 미래를 내다본 그 탁월한 안목 덕분에 지금 우리가 간송의 보물들을 마음껏 감상하고 즐길 수 있음을.

간송 전형필의 문화광복(文化光復)에 향한 간단없는 열망과 문화 보국(文化保國) 정신을 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가 3ㆍ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열리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지요. 많은 분이 전시장을 찾아 간송의 보물들을 만나는 기쁨과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유물 하나하나에 쏟아부은 간송의 피와 땀과 눈물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